혁신이 아니라 정상화

올해(2025년) 1월부터 통합혁신센터(Center of Innovation)이라는 신설 조직을 꾸려 현대오토에버의 기술이 고객과 현장의 구성원에게 효과적으로 닿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기술은 쓰임의 문제이고, 잘 쓰이도록 만드는 것이 IT 혹은 SW 개발 영역의 변하지 않는 화두입니다. 수십년 업계의 고민이 있었지만, 모두를 만족하는 정답은 없습니다. 고민에 대한 제 답안은 “쓰는 사람과 쓰는 사람을 이해하고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업계를 리딩하는 많은 IT 기업들이 이 방식을 이미 실행하고 있습니다.

현대오토에버가 혁신센터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IT 체계와 SW개발의 정상화입니다. 현대차그룹의 70여개가 넘는 계열사와 고객들의 필요를 Digitalization을 통해 가치로 전달하는 것이 현대오토에버의 책임입니다. 이를 위해 가치 중심의 사고와 유연하고 지속 가능한 체계를 구성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그룹 IT 혹은 제조 IT 틀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혁신이 필요합니다. 디지털 기반의 가치 중심 사고를 통해 SDV를 포함해 미래 모빌리티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 역할을 현대오토에버가 수행할 예정입니다.

통합혁신센터는 지도(Map)를 그리는 조직입니다. 지도를 따라 정상화라는 1차 목적지까지 현대오토에버 구성원들이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s://v.daum.net/v/20250326113442805

링크드인 포스트

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요?!

누가보면 딱 욕먹기 좋은… 하지만 답해야 할 질문이다.

뭘 하고 싶으신가요? 뭘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으신가요?

답은 본인이 정한 그 안에 이미 있는데,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으로 본인이 적어야 하기 때문에 두려운 건 아닌지.

지우개로 지우고 또 지워서 뭉개진 그 위에서 멍한 모습이 당신 모습 아닌가요?

스스로 당당해야 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오늘 현재의 그 모습에서.

결국 내가 나를 답합니다.

한계 – 안주할 것인가 확장할 것인가

한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종종 목격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라고 단언한다. 특히 오랜 직장 경험에서 비롯한 연륜의 느낌을 잔뜩 섞어 주니어들에게 세상은 특히 이곳은 이런 곳이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분들은 “한계”라는 이름으로 안전 지대를 만들고 있다. 나의 문제, 혹은 노력 부족이 아니라 한계라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과 조건 때문이라는 변명을 하고 있다. 아주 딴딴한 절대 불변의 변명의 철벽이 “한계”이다.

하지만 한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각자 개인 혹은 조직의 심리가 한계를 고착화시키고, 딴딴하게 고정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고정되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상황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한계를 잘 사용할려면 이를 잣대(Barometer)로 써야 한다. 한계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우리의 상황을 진단했고, 다음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에 답하면 된다. 기존의 사고 틀을 바꾸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계를 확장하자. 굳이 모양이 이쁠 필요는 없다. 되려 투박하게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넓혀가면 된다. 넓혀가고 있고 포기하지 않는게 중요하다. 인식된 한계를 잣대로 사용해야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잘못된 편향으로 쓰면 안된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오토에버를 생각해본다. 현대오토에버는 시장에서 그룹사 자체 물량(Captive)으로만 성장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현 상황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그만큼 현대차 그룹이 “Together for a better future”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Digitalizing을 실현해야할 책임을 갖는 현대오토에버는 만들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넘기는 SI 방식이면 안된다.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한 “서비스(Service)” 중심의 개발과 운영 역량을 콕 찝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대오토에버의 미션은 현대차 그룹의 Digital Transformation을 Digital 혹은 온라인 서비스 관점에서 실현시키는 것이다. 공공이나 민간 SI를 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오토에버가 당장 감당할 몫일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역량을 축적할 것이다. 당당히 현대차그룹내에서 실력을 보여주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생가지 않을까? 누구나 인정하는 전문가에게 일을 부탁하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까?

되돌아가 우리의 한계는 무엇인가? 현재의 한계에 안주한다고 했을 때, 과연 현대차 그룹이 꿈꾸는 동반성장을 통해 만들어갈 더 나은 미래를 디지털이라는 수단으로 완성할 수 있을까? 완성할 수 없다면 우리의 한계를 어디까지 넓혀야 당당하게 “이 책임을 현대오토에버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부끄럽고 창피하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자 한계임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한계점을 설정하고, 조직의 역량을 통해 새로운 한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제시하고 이끌어야 한다. 리더십의 일원이 내 몫이기도 하다.

책임 어떻게 질 것인가?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뻔하게 내가 빼지않고 사용하는 단어가 책임이다.

리더는 단순히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지는 자리고, 그 책임을 온당하게 지기 위해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라고. 근데 뭔 책임인데?

리더가 져야 하는 책임은 조직이 주어진 혹은 선언한 사명(Objectives)을 온전하게 달성하게 하는 것이다. 달성하지 못하면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떻게 달성할까?

조직의 목표와 달성했을 때 도출되는 결과는 조직, 즉 구성원들이 만드는 것이다. 리더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리더는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직내 합당한 역할을 정의한다. 그리고 위임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리더 한 사람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조직의 힘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합당한 역할(사람)이 그 몫을 다할 수 있도록 구조라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환경을 만드는 것이 “권한 행사”다.

종종 권한의 종속적 개념으로 책임을 이야기하는 분이 있기도 하다. 완전 잘못된 생각이다.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리더의 책임이고, 온전하게 리더가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조직의 규모에 따라 혼자 모든걸 이룰 수 있다는 생각도 지극히 1차원적이다. 이런게 되면 일론 머스크는 이미 화성에 갔다. 조직이 하는 것이고, 책임을 기반으로 위임해야 한다. 위임을 하기 위해 올바른 권한 행사를 하는 것, 그것이 어찌보면 리더의 역량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시나요?

함께 일하는 구성원이 퇴근하면서 한 질문이다.

내가 일하는 업무 강도를 보면 임원이라는 건 하면 안되는 포지션이라고, 줘도 안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구성원이다. 매일 새벽 출근에 못해도 3일은 술먹고, 술을 안먹으면 밤 9시 근방까지 사무실 근방에 있다. 거기다가 하루 종일 떠들기까지. 저녁 무렵에는 목이 잠겨서 말이 나오지 않는 날도 있고. 적고 보니 그닥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긴하네.

구성원 질문에, 글쎄? 흠…

그닥 근사한 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꿈” 이라고 이야기해줬다.

나이 50 넘어 뭔 뚱딴지 같은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 특히 이 일은 쉽지 않은 대기업, 그것도 언제라도 짐을 싸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자리여야 해볼 수 있는 일이다. 뭐 얼마나 거창한 일이라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된다고 하면 의미있고 재미도 있을 그런 꿈이다.

항상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언제든 그 일에 의미를 더한다면 더욱 최선을 다하고 싶은게 당연지사 아닐까 싶다.

최선을 대해 이루고자 하는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고 싶다. 이쯤되니 시간이 중요하고 더 잘 최선을 다해 쓰고 싶은 생각뿐이다.

리더십의 동기부여 – T자형 인재

컴퓨터와 인터넷은 급속한 지식 확산의 시대를 만들었다. 더불어 기술의 진보는 앞선 이야기처럼 인력(사람의 물리적 힘)을 넘어선 더 큰 능력을 사람에게 부여하고 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사람의 손가락 끝으로 버튼을 누르거나 마우스 클릭만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식이 주는 힘은 이제 확실하게 일을 해내는 바탕이 됐다. 산업 혁명을 통해 선진화된 대부분의 국가들이 보편적 교육 체계를 수립하고 공교육을 의무화한 이유는 제대로 아는 노동자가 더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에서 기계라는 물건을 쓰는 환경으로 변화되어 작업의 효율은 기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지 여부에 직접적으로 비례하기 때문이다.

보편 교육을 보더라도 생활 지식을 위한 일반 교육과 직업과 관련된 전문성을 쌓기 위한 고등 교육으로 나뉜다. 국내에서 고등학교는 애매한 중간 성격을 갖고 있지만, 대학은 대부분 간다는 인식상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일반 교육 영역으로 본다.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이 직업에 필요한 높은 수준(혹은 기본기 수준)의 지식을 가르치는 고등 교육 기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보편 교육 체계는 일상의 상식과 인식에 대한 교육을 위주로 한다. 사회라는 집단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적인 사고 방식과 함께 공동체 일원으로 행동하기 위한 예절 규범도 중요하게 배워야 할 내용이다. 사람에 따라 학습 수준의 차이에 따라 폭과 깊이가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걸 배우는 건 맞다.

고등 교육은 전문 영역에 대한 심화된 내용을 학습한다. 사람을 만날 때 MBTI를 질문하는 이유는 그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갖는 유전적 특징과 부합하는 “일”이 존재하고, 그 일을 했을 때 최대의 효과성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도 행복하다. 전문화된 기술을 학습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이미 널리 알려진 분야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많은 전문가들의 업적들이 쌓여있다. 평생 공부해도 다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직업 수행을 위해 필수적인 혹은 체계적으로 분류된 내용을 배운다. 고등 교육 체계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소위 인재를 길러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대학은 전문 지식을 공부하고, 석사는 공부하는 법을 배우고, 박사는 왜 공부하는지를 답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낸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단계를 거치면서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뾰족하게 갖춘다.

지난 학생 시절을 돌이켜보고, 현재 아이들의 현재 학교 수업 내용을 봐도, 왜 고등학교에서 미적분과 확률 및 통계를 배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다른 과목도 이해할 수 없는 교육 내용들이 많다. 일이 아닌 일반 사회 생활에서 미적분을 쓸 일이 몇 번이나 되겠는가?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번 있었던 것 같다.) 한국 교육 체계에서 고등학교를 보편 교육으로 분류하는 반면 독일의 경우에는 직업을 위한 고등 교육을 고등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다. 요즘처럼 지식 학습 속도도 빠르고, 체격적으로 준비된 상황에서는 독일의 사례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또한 대학은 전문성이라는 관점에서 합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인재를 길러내야 하지만 양산하고 있는건 아닐지 우려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안타깝지만 현실이 되었고, 단지 한국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냥 직업이 아닌 좋은 직업에 대한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고연봉과 함께 직업 안정성을 보장하는 큰기업과 같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좋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제한된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서 대학은 개인의 경쟁력을 학위로 증명하기 보다, 좋은 직장에 입사하기 위한 “어느 대학”이라는 자격증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시점의 현실은 소위 좋은 회사의 신입 사원 채용 대상은 인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서울 소재 대학이어야 신입 사원 관문을 뚫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인서울이면 다 같은 “서울대”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회사가 문제인가 대학이 문제인가? 어느 한 쪽의 문제라기 보다는 서울에 과밀된 인구가 문제라고 본다. 인구의 집중은 기회의 집중을 의미하고, 거주비를 포함한 높은 경쟁 비용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높은 위치에 있는 소수가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사회가 시스템적으로 대응해야 해결 가능하고 큰 두 주체인 회사와 대학의 노력은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

보편 교육과 고등 교육을 염두에 두고 보더라도 사회는 교육 환경을 통해 구성원에게 보편성과 전문성을 갖춘 T 자형(혹은 쐐기형) 인재가 되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현재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일부 왜곡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높은 동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T의 쐐기를 깊게 만들 것이다. 필요한 이유(동기)가 있다면 배울 것이고, 배운 내용이 본인의 지적 자산이 되면 쐐기의 한 계층으로 쌓일 것이다. 높은 동기가 자극제로 동작해 결과로 누적된 것이 역량(지적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P=MxA 형태로 성과를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했는데, 이 관점에서 보면 P, M, A는 독립 변수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 의존성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 시점만 두고보면 각각이 독립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지만 시간 흐름에 따른 장기적인 변화를 감안한다면 P, M, A 사이에 일련의 피드백 룹(Feedback Loop)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리더는 성과를 생각한다면 P(성과), M(동기), A(역량)가 상승 효과를 만들 수 있는 선순환 구조(Positive Feedback Loop)을 구상하고,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들 각각이 상호간 종속 변수임을 인정하고 의존성이 어느 순간에 발생하는지 조직 시스템을 설계하고, 관찰해야 한다. 특히 관찰은 매우 중요하다. 선순환 구조가 되어야 하지만 의도치 않은 변수에 의해 악순환 구조(Negative Feedback Loop)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 단계가 아닌 정착 단계에서 지속 가능한 선순환 구조가 정립되면 자연스레 높은 동기를 갖는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역량이 결집되고, 높은 혹은 좋은 성과들이 창출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순환 구조는 내버려두면 망가지기에 닦고 조이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리더십의 동기 부여 – 4차 산업 시대의 성과

지식 기반 산업 시대를 넘어 AI 혁명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IT를 기반으로 대량의 정보가 생산되고, 인터넷을 통해 국경의 제한을 넘어 정보가 유통되고 있다. 아날로그 기반의 일상이 디지털화되고 산업 현장 역시 디지털을 중심으로 일의 방식이 변화되었다. 특히 3차를 넘어 4차 산업 혁명 시대는 IoT를 통한 초연결성과 함께 AI를 통해 인간이 그동안 생각할 수 없었던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초지능화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산업 시대는 개인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제공한다. 특히 1인 창업이 가능할 정도로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낼 수 있는 환경이다. 많은 부분들이 기계를 통해 자동화되었으며, 또한 물리적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었던 기존 환경이 이제 디지털을 통해 제어와 모니터링이 가능하다. 재택이 일하는 형태의 논쟁 중심에 있을 만큼 디지털을 통한 연결성은 일하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을 뒤흔들고 있다.

산업 혁명 이후에 인간의 역할과 가치가 물질화되고, 전체가 아닌 과정의 일부로 종속되었다면, 현재의 인간은 디지털이라는 막강한 도구를 바탕으로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지식과 기계화(혹은 자동화)를 통해 경계를 뛰어넘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인간은 컨베이어 벨트의 한 구간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자동차 제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한다. 단순한 과정을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던 것에서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제대로 된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지식 산업 시대의 도래 이후로 성과를 잘 내는 사람은 과정의 한 부분에 종속된 사람이 아니라 전 과정을 아우르는 사람이다.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과를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식을 통해 결과 창출하는 시대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지식의 폭과 깊이를 얼마로 가져갈 지는 성과를 내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치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인텔의 CEO를 역임했던 앤디 그로브(Andy Grove)는 사람의 성과(P: Performance)는 일하고 싶은 의지(M: Motivation)와 일과 관련된 그 사람의 역량(A: Ability)의 곱이라고 정의했다.

P = M x A

인텔이 산업을 지배하기 직전 진공관에서 고직접 회로 시대로 이행됐고, PC를 기반으로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중심의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Paradigm)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인텔은 지식의 범위가 자본을 가진 기업 중심에서 일반 개인으로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보편적이며 확산을 가속화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했으며, 기술 집약 혹은 지식 노동자가 가치를 만드는 대표적인 회사였다.

무어의 법칙을 실행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도전과 성장이 필수었고, 시장을 주도하기 위한 성과가 필요했다. 앤디가 정의한 성과 모델은 지식 기반 노동과 고부가 가치를 추구하는 환경에 적합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가치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 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그럴 때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든다. 조직 역시 사람이 구성하는 것이기에 구성원의 능력과 일에 대한 의지의 관계성에 따라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드는 조직 혹은 회사가 된다.

 

성과가 만들어지는 두 가지 요소인 의지와 역량을 XY 축으로 놓고, 사분면에 위치하는 구성원의 특징을 정의해볼 수 있다.

마이크로매니징(Micro-managing) – 업무와 업무 지식이 부족하고 일의 의미를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다.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지시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 “일”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명확한 가이드와 전후 맥락에 대한 설명과 구체적인 지시가 있어야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일의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고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만약 스스로 이런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면 본인과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나치게 자신을 현실에 묶어두기보다는 다른 일을 찾는게 현실적이다.

가르침(Teaching) – 의욕은 충분한데 본인의 지식이 아직은 부족하거나 완숙되지 않았다. 주로 신입 사원 경우가 대표적이다. 본인을 일로써 증명하고 싶고, 빠른 결과를 위해 조급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약간의 자제와 더불어 성향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 나가면 좋을지 방향을 잡아주면 좋다. 그리고 방향에 맞춰 나가고 있는지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면 된다. 마이크로매니징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마이크로매니징은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반면에 가르친다는 것은 방향으로 과제를 주고, 과정으로 과제를 해내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본인의 몫이다. 이야기한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분명 그쪽으로 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해주면 더 좋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존중과 경청을 보여주면 더욱 효과적이고 스스로 다음을 볼 것이다.

위임(Empowering) – 일을 왜 하는지 그리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혹은 그 이상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상황이다. 도달해야 하는 목표를 알려주고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위임 단계의 가장 큰 지원은 책임져 주는 것이다. 처음 위임을 통해 업무를 스스로 진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 할 수 있나? 혹은 해도 되나? 와 같은 질문들이 스스로를 괴롭힌다. 이 상황을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위임한 사람의 신뢰다. “책임은 내가 질테니 한번 해봐라.” 와 같은 실행하는 사람의 책임이 아닌 위임한 사람이 책임지는 신뢰가 드러나야 한다. 여기에서 신뢰는 상호 신뢰다. 위임의 기본은 받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겠지만 반대로 내가 아닌 위임하는 사람의 책임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호 신뢰 기반의 위임이 반복되면 스스로 방향을 찾아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된다.

썩은 사과(Rotten Apple) – 능력을 일이 되는데 발휘하는게 아니라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는데 이용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자신은 값어치만큼 일한다고 믿고 있고 또한 충분히 일한다고 주장한다. 조직 시스템이 돌아가기 위해 각자가 해야 할 일의 몫은 조직의 다른 구성원의 몫을 채우는 것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밖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내부에서 자신을 지원하기 때문에 돈을 벌지 않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더해 벌어야 한다. 내가 받는 연봉의 3~5배 매출을 해야 조직이 돌아가는 이유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연봉만큼 번다는 것에 만족하며, 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여름에 먹을만큼 일하고 겨울에 굶어죽는 베짱이와 다름이 없다. 한 사람이라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사람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통해 조직에 급속하게 전파된다. 저 사람이 일을 안 하는데 내가 열심히 일할 이유를 찾는 사람은 없다. 이기적 유전자는 내가 남보다 낫기를 원하지만 남보다 나아질 상황이 안 되더라도 남보다 못한 대우받길 원치 않는다. 경제체제로써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다. 공산 체제처럼 공멸하는 조직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사람은 빨리 내보내야 한다.

리더십의 동기 부여 – 성과(Performance)란?

성과를 이야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식구들 먹이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나가던 시절에는 성과라는 단어는 없었다. 성과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 이상의 잉여(剩餘, surplus)가 생기며 등장했다. 인류사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는 것을 멈추고, 남은 것을 서로 교환하기 위해 화폐 비스무리 한 것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잉여 활동은 확장됐다. 잉여를 더 많이 만들수록 남들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것이 확인됐고, 연명하기 위한 생산이 아닌 축적하기 위한 생산을 통해 부(富)를 실현했다. 당연히 단위 시간당 더 많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고민하면서, 성과라는 개념이 도출됐다.

성과를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명확한 결과를 보여준 시점이 산업혁명 시대다. 물론 이전에도 성과라는 단어와 개념이 존재했지만, 단위 시간당 생산량이라는 관점은 산업혁명부터 제대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시기에 여성 노동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옷감 만들기가 방직 기계로 대체됐다. 장시간에 걸친 반복적인 작업이 필요하기에 비쌀 수 밖에 없었던 면직물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산업의 변화, 즉 혁명을 일으켰다. 사람의 힘이 아닌 기계의 힘,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힘으로 수력이 사용되면서 시간당 생산량이란 개념을 실현했다. 수력에 의해 움직이던 방직 기계가 증기 기관이라는 혁신적인 동력원을 통해 산간, 해안 지대에서 수요처와 가까운 도시 지역으로 옮겨졌다. 충분한 생산량은 지역내의 소비가 아닌 국가간 무역을 촉진하면서 무역상이라는 거대 자본의 탄생 배경이 됐다. 그리고 해상 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우던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무찌르면서 당시 세계 판도가 바뀌는 사건도 일어났다.

생산 관점에서 또 다른 성과의 변화를 보여준 것이 포드(Henry Ford)의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자동차, 즉 모델 T(Model T)의 생산 방식이다.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이지만 자동차는 대단히 복잡한 생산품이다. 수많은 부품들이 오차없이 동작해야만 돈값하는 물건이라 비쌀 수 밖에 없다. 당연히 복잡한 동작을 제대로 이해하고 퀄리티 있는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비쌀 수 밖에 없는 물건이었고, 가진자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다. 이런 값비싼 자동차를 일상의 자동차로 변화시킨 것이 바로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다.

포드가 실현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이전과 이후의 가장 큰 차이는 효율(Efficiency)이 생산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복잡성을 이해하는 소수의 전문가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전문가를 돕는 조수들이 있었지만 전문가의 지시를 받아야 했고, 전문가 수준의 경험을 쌓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반해 포드 방식에서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차가 작업자가 위치한 곳에 오고 작업자는 자신이 해야할 지정된 작업을 자신 앞에 차가 머무는 시간 안에 마쳐야 한다. 각각의 작업은 단계로 구분되고 작업자는 자신의 작업 결과만 책임을 지면 된다. 차량 한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전체 과정을 마쳐야 완성되기 때문에 한 과정의 실수가 전체 품질에 영향을 준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감당할 작업의 난이도를 낮추기 위한 방안으로 과정을 분해해 잘게 나누는 방법이 사용됐다. 언뜻보면 잘게 나누면 사람만 더 많이 들어가는 것 아니냐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더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한 과정 자체의 복잡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를 숙련도가 낮은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

공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감당할 문제가 간단해졌으니 이제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만 올리면 된다. 이전 속도는 꼭 있어야만 하는 “사람의 속도”에 의해 좌우됐지만 이제 낮은 속도를 보이는 사람은 열심히 하겠다는 사람으로 교체하면 그만이다.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대량 생산 체계라는 시스템의 등장이고, 속도의 주체였던 사람은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따라가는 존재가 됐다.

대량 생산 시대에서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효율이다. 단위 시간당 생산량(Throughput)이라는 숫자가 성과를 좌우하고, 숫자가 올라갈려면 나만 잘하면 되는게 아니라 전체가 잘 해야 한다. 단순화해서 업무 단위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사람은 자원(Resource)이기 때문에 너무 많으면 곤란해진다. 프로세스를 효율화하고 효율화된 프로세스에 맞는 사람이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러니지만 이런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 소위 공교육이 도입된 것도 사실이다. 알아야 하지만 많이 알 필요는 없기에 초등학교 과정이 대부분의 산업화 시작 국가에서 시작된 이유이기도 하다. 중/고등 교육은 수반되는 비용 문제로 OECD 수준의 국가는 돼야 생각해 볼 수 있다.

Throughput 중심의 성과에 대한 관점 변화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촉발된 새로운 경쟁 구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냉전과 거대 자본을 통한 글로벌 경쟁 환경은 더 빠른 계산을 요구했다. 주판알을 튕겨 숫자를 맞추던 시대에서 순식간에 몇 만장의 회계 장부를 처리하고, 달에 사람을 보내기 위한 수만가지 변수를 고려한 반복적인 계산이 필요한 환경은 기존과 다른 방법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컴퓨터가 복잡성과 반복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트랜지스터에서 출발한 고직접회로(IC) 칩과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 제작에서 사람이 기여하는 핵심은 설계(Design)지 제작(Manufacturing)이 아니다. 사람이 직접 필요한 단계 역시 설계 과정이지 제작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작은 사람 손으로 할 수 없는, 마이크로미터 혹은 나노미터의 작업이다. 손떨림이 있는 사람이 하는게 아니라 기계가 할 수 밖에 없다. 더해서 설계를 하더라도 생산 설비와 환경이 고려된 방안이 나와야 실효성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반복적인 작업은 이제 기계가 담당해야 하고, 사람은 설계와 구조를 고민하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만족시킬 수 있다.

생산에서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Performance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이다. 대량 생산 시대에서 사람은 자원으로 정의되었으며 심한 경우 시스템을 구성하는 부속품 수준으로 간주된다. 국가 수준에서 제한된 지식의 확산이 2차 대전 이후 국가 경계를 넘어 극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IC칩과 컴퓨터의 출현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이제 정보(Information)라고 말하고 있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 유통이 새로운 권력과 부의 지배 구조를 만들고 있다. 정보 기반의 새로운 산업 혁명이 시작됐다.

지식 기반 산업 시대에 “사람”에게 요구되는 성과는 단위 시간당 생산량이 아니다. 높은 가치 창출을 자기주도적으로 만들길 요구하고 있다. 시키는 일을 하면 되는게 아니라 맥락을 파악하고 종합적인 판단과 실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의 한 부분에 서 있는게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를 창조하는 것이 새로운 산업 혁명 시대의 개인에게 요구되는 성과다.

세상의 흐름을 살펴보면 아이러니 투성이다. 역사를 재미뿐 아니라, 지식으로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더십의 동기부여 – 왜 일하는가?

시대의 담론(談論)으로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동기(Motivation)부여다. 인간이 사회라는 체계를 만든 이후부터 스스로에게 혹은 함께하는 구성원에게 던지는 가장 많은 질문이 “왜 일하는가?” 이다. 인간은 혼자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사회라는 시스템에 속할 수 밖에 없다. 시스템을 인정한다면 자의든 타의든 리더 본인을 포함해 구성원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자의와 타의가 오묘하게 섞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회가 가족이다. 가족의 리더인 엄마와 아빠는 사랑을 매개로 자율적으로 성립되지만 구성원이 될 자녀들은 선택권을 부여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가장 입장에서 최소 어느 시점까지는 가족 구성원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 누가 나의 아들이 될지 딸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가장이라면 가족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일반적인 가족 공동체 안에서 가장의 역할이다. 물론 언제까지나 이 무거운 짐을 가장의 어깨에만 얹을 수 없기에 가족 안에서 생활의 역할과 부담을 나눌지 진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왜 일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이 가족의 부양이 아닌 시점이 온다. 나이가 들고 시대가 변하는데도 가장의 역할이 부양에 대한 압박뿐이라면 고통이 될 수 있다.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서도 일의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 것처럼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 많은 질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직을 통해 자신이 속할 조직을 선택할 수 있기에 왜 스스로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물음을 갖는게 당연하다. 질문에 제대로 답을 얻는 사람은 일에 대한 재미와 보람을 느낄 것이고, 당연히 만족할만한 결과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은 조직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답을 찾게 되고 나아가 이직/이동을 준비하는 기간동안 하는 일 역시 불만에 가득찬 결과일 것이다. 불만에 가득찬 결과는 하는 사람에게도 불행이고 결과를 기대하는 조직의 다른 사람에게도 불행을 안긴다.

“왜 일하는가?”에 대해 어떤 답을 하는지가 구성원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동기부여는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자신이 찾은 답에 따라 개인이 조직에 기여하는 수준과 결과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개인과 조직이 만들어낸 결과를 성과(Performance)라고 부른다. 양적, 질적 성과를 기대한다면 하는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시대 변화를 통해 일하는 체계의 변화가 많았지만 시스템을 주도하는 리더가 제시하는 방향과 실천하는 모습에서 리더 본인을 포함해 구성원이 생각하는 일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일의 주체인 개인이 갖는 일의 의미에 따라 결국 시스템의 동작이 결정된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먼저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번째는 일을 하는 이유, 즉 동기는 주어지거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하는 것이다.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왜”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바로 주체로서의 개인이다. 두번째는 높은 성과를 위해 특정한 장치를 이용해 동기를 높이는 것은 억지일 수 밖에 없다. 일시적으로 동작하지만 지속되는 걸 기대하기 어렵다. 일에 대한 스스로 비슷한 답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방향성을 갖고 모여 결과를 만들 때 위대한 결과가 만들어지고, 높은 수준의 결과가 이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리더십의 안전감 – 끼리끼리의 폐해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사람 사는 어디나 필요하고 중요하다. 특히 조직 사회는 목표 달성이나 성과를 내기 위해 사람 혹은 팀들의 협업이 필수다. 좋은 협업이 이뤄져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설령 결과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다는 성장의 마음가짐을 얻어갈 수 있다. 구성원이 심리적인 두려움 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심리적 안전이 보장될 때, 리더와 구성원 사이의 협업은 물론 구성원과 구성원 사이의 협업도 원활히 이뤄진다.

조직이라는 틀 안에서 팀 플레이는 친밀감이란 기반이 필요하지만, 리더의 판단과 결정에 친한 사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리더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팀이라는 조직 환경에서 친밀함은 구성원이 심리적 안전을 느낄 수 있는 장치가 되야 한다. 그러나 친밀함이 선을 넘는 친한 사이가 되고, 리더의 결정이 리더와 친한 사람들의 결정으로 다른 구성원이 인식하면 문제가 된다. 리더가 내리는 의사 결정은 온전한 책임을 위해서라도 리더 본인의 몫이어야 한다. 당연히 올바른 결정을 위해 다른 구성원의 도움을 받아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 그렇기에 공적 관계 안에서 공정하게 도움을 받도록 리더가 관리해야 오해를 피할 수 있고, 도움도 편한게 받을 수 있다.

공적 관계는 공개적인 혹은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관계를 말한다. 투명성이 보장되고, 누구나 의견에 의견을 덧댈 수 있는 자유로운 자리에서 소통이 이루어져야 공적 관계가 효과적으로 동작한다. 회의 형태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상 옆에서 나누는 대화도 공적 대화의 대표라고 생각한다. 이외에 따로 시간을 잡고 하는 일대일(1 on 1) 대화 역시 대표적인 공적 대화의 한 형태이다. 공개적으로 선언된 일대일 대화를 적극 활용하면 의사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정보 수집의 불투명성을 제거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사적으로 친한 그들만의 모임과 대화를 통해 결정이 이뤄지는 구조는 지양해야 한다. 대표적인 모습이 흡연 장소나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의사 결정이다. 흡연이 문제가 될 수 없지만 흡연하러 가는 사람의 조합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저녁 술자리 구성원 역시 비슷하다. 담배 피우는 사람과 술 마시는 사람은 일부분일 수 밖에 없고, 대체로 같은 사람들과 자리를 반복하게 된다. 문제는 이 자리에서 이뤄지는 결정에 비흡연자나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의견은 배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원하던 방식으로 결정이 이뤄지면 다른 구성원은 리더가 일부 인원에게 편향되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는다. 이런 의심은 결정이 옳은지 아닌지를 떠나 리더를 신뢰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회사 구성원 사이에 형, 동생과 같은 사적 관계의 대표 호칭을 사용하는 것 역시 전체 구성원에 대해 신뢰 관계를 해치는 행동이다. 조직 안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관계에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가 사적 호칭에 의해 특정 개인에 우호적인 결정일 수 있다는 일말의 의구심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말(言語)은 본인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편향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아니라고 하지만 일상적인 말의 힘으로 자칫 잘못된 의사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

형, 동생 사이와 같은 호칭은 성차별적인 요소를 갖고 있기에 더욱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여전히 조직 사회는 남성 중심이고, 여성에게 유리 천장은 매우 두껍다. 현실의 벽이 있는 상황에서 남성 구성원 사이에 형, 동생의 호칭을 듣는 여성 직원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차별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이런 비판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2010년대 중반 이후 벌어진 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촉발된 D&I(Diversity and Inclusion) 정책을 펼친 여러 기업에서도 “Hey Bro!” 라는 일상적인 인사말로 남성 직장인 사이에 쓰이던 말 역시 성차별적 발언이라고 규정하고, “Hi there”과 같은 중립적 언어의 사용을 권고했다. 전직장이었던 라이엇게임즈에서도 게임 업계에 만연한 남성 중심의 언어와 업무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참고)

개인적이지만 구성원과의 퇴직 면담에서 유사한 사례의 피드백이 있었다. 본인이 팀과 조직장과 갈등 사이에 최종적으로 퇴사를 결정했고, 상위 조직장인 나와 면담을 요청해 이야기를 진행했다. 갈등의 순간에 “왜 조직장 혹은 상위 조직장에게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지? 퇴사 결심하기 이전에 먼저 이야기할 용기를 낼 수 없었는지?”를 질문했다. 변명하자면 스스로 열린 소통과 심리적 안전의 중요성을 리더들에게 강조해왔고, 친밀함을 통해 안전 장치가 동작하도록 신경써야 한다고도 이야기를 했었는데 구성원에게 동작하지 않은 원인을 알고 싶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구성원의 조직장, 상위 조직장, 내가 아침마다 모닝 커피를 함께 마시며 농담하는 사이고, 종종 비공식적인 술자리를 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야기해봐야 의미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아차, 실수했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에게는 일찍 출근한 동료들과의 짧은 일과 준비 시간이 다른 구성원들의 눈에는 그들끼리의 “한통속”이 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후 팀장 이상 조직장 미팅에서 피드백의 내용과 나 스스로 끼리끼리 문화를 구성원 관점에서 조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앞으로 특별한 업무 내용이 아니면 따로 부르지 않을테니 오해없었으면 한다는 내용도 함께 전했다. 팀장들 가운데 “팀장은 맘편한 사람들끼리 담배 한대, 커피 한잔, 소주에 삼겹살도 안되는거냐?”라는 볼맨 소리가 있었지만, 리더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는 해줬던 것 같다. 그 뒤로는 혼자 모닝 커피를 마신다.

리더는 필요하다면 누군가 희생하는 결정을 해야 하고, 그 희생에 대가를 보장하면 안된다. 리더의 판단과 책임은 조직 전체를 대신하는 판단과 책임이다. 조직 전체의 Global Maximum을 위해 구성원 혹은 특정 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하도록 만드는 일이 리더가 갖는 판단의 무게다. 구성원이 Local Maximum을 추구하는게 아닌 Global Maximum에 공감하면 자발적으로 응하겠지만, 아닌 경우라도 리더의 판단과 지시를 따라야 한다. 냉혹한 판단 지점에서 리더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리더는 되도록 편향되지 않아야 한다. 피드백은 받아들이지만 리더가 직접 결정하고 공개적으로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회사라는 조직 체계에서 형, 동생은 없다. 형이나 동생은 사적 관계를 의미하고, 책임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조직의 리더 입장에서 결정의 객관화와 합리성을 위해서도 사적 관계를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특히나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게 아니라면 형이 될 수 없고, 동생이 될 수 없다. 괜히 형, 동생하다 좋은 인간 관계만 망가진다. 회사를 떠나더라도 오래 볼 수 있는 사이가 일 하나를 두고 다시 보지 못할 사이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관계는 아는 것에서 시작해서 진심이 통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형, 동생이 진심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